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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2차/데레마스
2016. 3. 3. 22:27
눈
2015-11-13
후미냐
아나스타샤x사기사와 후미카
남독, 이나 다름없는 버릇일지도 모릅니다. 이건.
할 일이 없다면, 시간이 남는다면.
어느 날에는 벤치에, 어느 날에는 카페에서, 어느 날에는 연습실 바닥에서, 어느 날에는 길 가다가 문득.
그리고 오늘은, 크로네의 그룹 회의 후 휴게실의 긴 벤치에서네요.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면... 아, 너무 얇아 책이라고 하기에도 무안하지만요. 읽던 책 몇 권을 숙부의 서점 카운터에 두고 와버리는 바람에.. 오늘은 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본 자판기에서 산 짧은 문학집이랍니다. 신기하지요, 자판기라는 건.. 분명 음료가 매대에 올라와있는 자판기들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거리를 둘러보면 아이스크림을 파는 자판기도, 양말을 파는 자판기도, 그렇게 책을 파는 자판기도 있으니까요. 언제부터 자판기는 생활의 여러가지를 다루게 된 걸까요? 아, 책에 집중하지 않는건 아니랍니다. 제대로 읽고 있어요. 블랙홀.. 이라는 걸까요? 시간과의 연결.... ...뭔가 전문적 지식이 있어야 더 쉽게 읽힐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하지만 여기, 이 표현은 마음에 든답니다. 주변을 삼킬 것 같은, 빛 한 점조차 용납되지 않는, 검다고도 느낄 수 없는 것을 저 멀리서 비추는- 푸른 별. 그 빛 만큼은, 그것에 빨려들어가지 않고.. 제대로, 빛나고 있ㅡ
"Простите."
"..아나스타샤, 씨..?"
"Да. 아나스타샤, 입니다! 음, 책..? 표지, 예쁩니다. синий звезда.."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걸 보면, 분명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는건 확실한 것 같아요.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고 이쪽을 내려다보며 갸웃하는 모습에, 앞 표지와 함께 잡고 있던 책갈피를 빼 지금 읽던 곳에 살짝 걸치고 덮었어요. 책을 읽는 건 좋아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방해하면 안되니까요.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한답니다. 무릎에 얹은 책을, 아나스타샤씨는 톡톡 건드리며 말했어요. 뭔가... 표지가 예쁘다는 말 밖에는 모르겠지만. 손으로 별 그림 주변을 둥글게 휙휙 몇 번 호를 그리기에 그 얼굴을 보니 방긋방긋, 웃고 있네요. 그 손짓을 가만히 보니, 아. 이 푸른 별 그림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에요.
"마음에.. 드나요? 이 책... 별 이야기가 들어간답니다."
"....Звезда...!"
"빌려.... 드릴까요..?"
"...음-"
아까와 같은 러시아어.. 어떻게 발음해야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마 별.. 이라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감탄사 같은걸까요? 음...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알겠어요. 하지만 마음에 들어하시는 것 같아, 책갈피를 빼고 아나스타샤씨에게 책을 내밀었어요.
"Нет."
"아, 역시 별로.. 신가요?"
"후미카, 읽어주세요."
".....에..."
짧은 한 마디를 하며 내민 책을 다시 제게 밀기에 책은 별로신걸까, 싶어 담담하게 받았답니다. 억지로 읽는 책만큼 따분한 건 없을테니까요. 나중에 더 좋은 책을 추천해보자, 라는 자그마한 오기도 생겼어요. 무슨 책이 좋을까... 숙부의 서점, 서가를 떠올리는 그 짧은 순간에 아나스타샤씨는 벤치에 몸을 길게 누이며 제 다리에 머리를 올렸습니다. 피곤하신걸까요, 아니면 그냥 눕고 싶으셨다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흔하게 하시는 스킨쉽이라던지... 어떤 방향이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요. 누군가 기대오는 상황은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랍니다. 그나저나, 읽어달라고 하실 줄은 몰랐네요. 어쩐다.. 되도록이면 혼자 읽는게 더 집중되시겠지만.. 게다가 이거, 동화같은 이야기도 아닌걸요. 제가 읽어드린다고 머리에 들어올 내용은... 아닐텐데.
"....네.. 그럼ㅡ"
"Спасибо."
이러니 저러니해도 책을 읽는다는건 즐거우니까요. 혼자 차분히 읽는 것도, 누군가에게 조곤조곤 읽어주는 것도 전부 독서의 일환이라 생각한답니다.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서, 첫 페이지로 돌아갔어요. 중간쯤에는 드넓고도 까만 우주가 배경이 되지만, 시작은 여기.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나아간답니다.
ㅡ
"... 새카맣게, 하지만 저 너머에서는 시리도록 푸르게. 고개를 돌린 작은 각에서ㅡ"
"...."
"...빛나고.. 있어요. 그 별은, 온전하게 빛을 보이고 있어요."
".....-!"
"......?"
아나스타샤씨는 줄곧 눈을 꼬옥 감고 자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숨을 쉬며 누워있었어요. 이따금 스스로의 배 위에 깍지 끼어 올린 손가락을 들썩거리는 걸로 아나스타샤씨가 적어도 숨을 쉬지 않는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고 말하면, 웃으실건가요..? 마치 책 읽는 걸 방해하지 않으려는 착한 아이처럼, 아나스타샤씨는 얌전하고 조용하게 제 낭독을 듣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조금 전의 단문에서 무슨 생각이 든 건지 눈을 살며시 떴어요. 책으로 인해 반쯤 가린 아나스타샤씨의 얼굴의, 푸른 눈과 마주쳤답니다. 아나스타샤씨도 그 한쪽 눈을 저에게 맞추시더니, 깍지 낀 손을 풀어 읽고 있던 책을 뺏어들어버렸어요.
책이 시선 밖으로 나가자, 저희 둘은 온전히 시선을 맞출 수 있게 됐어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걸까, 조금 의아해졌어요. 혹시 방금 지문은 그렇게 읽는게 어울리지 않았던걸까요?
"...? 아, 역시. 역시입니다."
"역시, 라니... ......아...!"
아나스타샤씨는 온전히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참 전처럼 다시 저를 내려다보았답니다. 어깨에 손을 살포시 얹던, 그 전처럼 말이에요. 사실 이런 자세로 누군가를 올려다보면, 정리하지 않은 앞머리가 눈을 덮어버려서 조금 답답해요. 아이돌을 시작하게 된 이상, 다른 분들과 제대로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무대 전까지는 쭉 거의 이런 느낌으로 다닌답니다. 평소에도 조금만 더 앞머리에 신경을 써볼까, 라고 생각할 쯤에... 아나스타샤씨는 제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겨버렸어요. 예상치 못한 행동이라, 당황함이 눈에 띄었을 거예요. 시야를 가리던 앞머리가 넘어가니, 전의 자세와는 다르게 몸을 이쪽으로 숙여, 가까워진 아나스타샤씨의 푸른 눈과 바로 맞았답니다.
"이거 보세요. 후미카, синий глас- красйвая..!"
".....네..?"
"후미카, 푸른 눈. 아름답습니다!"
"....아...... 그..."
"Красйвый!"
"....감사... 해요.."
아나스타샤씨의 칭찬에..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답니다. 왠지, 더 그 눈을 마주할 수 없었어요. 아름답다니, 그런 건.. 조금 부끄럽네요. 오히려 아나스타샤씨의 푸른 눈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에요.
왠지 귀 끝이 따끈해지는게 느껴져서, 의아해졌답니다. 계속 이대로 있는건 조금 그렇겠지요? 아나스타샤씨의 손을 꼬옥 잡아내렸답니다. 혹여 갑작스레 손을 쳐내는 느낌이 들으면 기분 나빠하실테니, 천천히 차분하게 내렸어요. 저 너머로 왠지 갸웃거리고 있을 아나스타샤씨가 그려져 고개를 더 숙였어요. 그리고 다시 슥슥, 앞머리를 가지런히 고쳤답니다.
"...책은... 잘 들으셨나요..?"
"Да."
"다음엔... 다른 걸.. 찾아올게요."
"Спасибо, 후미카. 아- 잘 쉬었습니다. 먼저 가볼게요."
"....네."
총총총- 하고 아나스타샤씨는 걸음을 옮겼어요.
저도 이제 일어나야겠지요. 책은... 나중에 다시 읽어도 되니까요. 왠지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으니, 돌아갈 길에는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마실거랍니다. 그리고 다음엔, 아나스타샤씨가 더 조용히 쉴 수 있을 시간을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목소리를 더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아, 책 내용도 중요하겠네요. 숙부의 서점은 오늘도 가야하니까 도와드리는 동안 천천히 골라볼 생각이에요. 별, 이야기면 되겠지요? 아.. 하지만 별도 꽤 많을텐데.. 그 중에서 푸른 별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면 왠지 더 좋을 것 같아요. 푸른 별.. 하지만 시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딘가, 따스하고 상냥한 그런 푸른 별의 이야기였으면 좋겠어요. 문득, 아나스타샤씨의 눈빛이 다시 떠올라요. 조금 먼 존재같았던, 홀로 시리게 무대를 비추던 그 푸른 눈을 한 사람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그건-
새벽녘의 푸른 하늘을 담았으면서도, 외로이 빛나는 한 별을 품었으면서도, 따스하게 비치는 눈...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