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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데레마스 2016. 11. 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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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6


닛타 미나미

닛타 미나미(x아나스타샤x타카가키 카에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시간만의 기상일까.

"아, 정말 오네… 눈."

 어언 반 년이 지났다. 그리고 딱 일주일 만에 사람이 이렇게나 피폐해질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놀라움이 반, 당연스럽다는 생각이 반 정도 머릿 속을 차지했다.


 무엇이든 열심히, 빛나는 스스로를 만나기 위해 달려나갔던 아이돌로서의 길은,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얗고 푸른빛 별을 향해 손을 뻗어가는 레이스가 되어있었다. 그런 스스로를 발견한 후에는 주위의 시선도, 갈채도 전부 압박과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신들이 보는 '나' 라는 아이돌은 많이 어긋나있고, 온전한 마음을 다해 아이돌로서 빛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슴을 찔러오는 나날을 보냈다. 그저 한 사람이 돌아봐주기 위해 계속해서 빛나려하는 그런 어긋난 길을 걷고 있던 나였다.

"ничего"

 대기실에서의 나는 옳은 아이돌로서의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부담감에 항상 위축되었고 함께 해주던 아냐는 그런 나에게 괜찮다며 위로와 격려를 더해주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결국 나는 그 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고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더는 온전한 활동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괜찮, 습니다. 미나미, 어떤 곳에 있어도 아냐에게는, 빛나는 звезда… 아냐가 찾아갈게요."

 그 말이, 아마 참고 있던 스스로를 휴식할 수 있게 만들어 준 마법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의 나는 그 말에 스스로 희망이라는 색을 입혀 하늘에 올려둔 채, 아이돌이나 동료로서의 내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닛타 미나미로서 빛나자, 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길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부터는 줄였던 라크로스 활동도 늘렸고, 태만해지지 않게 책도 더 꾸준히 읽었으며 놓친 부분에 대한 공부도 더 빠짐없이 했다.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빛나지 않는만큼 무대 아래지만 그 위에서 나를 더 잘 찾을 수 있게 무던한 노력을 했다. 더 새로운 것들을 찾아 시도하고, 누구보다 밝게 무대를 향해 웃으면 그 아이도 나를 보며 손을 흔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ㅡ라고 하는 소문이 팬들사이에 도는 모양입니다. 어떻게ㅡ」
「Да, 카에데ㅡ 아냐에게, 있어서 가장ㅡ」

 바로 저번 주에 봤던 연예계 채널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그 날, 그 인터뷰를 보자 그제서야 휴대전화 화면으로 뜨지 않았던 그 번호의 이유를 겨우 인정할 수 있었다. 반 년간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연락. 열심히 스스로를 갈고 닦던 시간 속에 들던 여러 생각과 의심과 고민. 그것들을 고이 접어두고, 아냐와 마주한다면 그저 밝게 웃어주려했던 다짐조차 절벽 너머로 밀어버린 그 순간을 떠올렸다.
 감히 내가. 그 밝게 빛나던 나의 별님을 의심한다는 것이, 방해한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몇 번이고 먼저 연락해보려 작성하고 지우고를 반복하던 임시보관함 속 메세지들도, 그러다가 어느 날은 참지 못해 전송을 눌러 보내버린 보낸 메세지함 속 답이 오지않던 메세지도 사실 전부 부질없던 것이였으리라. 아니, 아마 상대에게는 그보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었겠지. 아니. 아마 끊긴 인연의 닿는 것조차 되지 않은 마음이였으리라.

"생각보다 더 많이 오네, 눈."

 흩날리는 진눈깨비가 창 밖을 가득 칠했다. 반 년간의 희망과 주저앉던 날들의 반복 속에 첫 눈이 오면 잊자, 라는 다짐을 이제야 다시 꺼내 한 손에 쥐고 가슴 위로 올렸다. 손 끝에 차가운 감촉을 애써 느끼지 않으려 창 너머를 바라보며 손으로 하얀 빛 거리를 꾹꾹 따라눌렀다.

 그림같은 시린 거리 속, 푸른빛의 별님같은 모습은 오늘 역시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그 별님은 저 거리의 우주 속으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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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데레마스 2016. 5. 8. 19:19

기내



2016-05-08


닛타냐

닛타 미나미x아나스타샤






 
돌아간다, 라는 무거운 기분은 얼마 가지않아 잊혀졌다. 시트에 붙은 액정 속 항공정보는 고도만 다를 뿐, 여전히 한 장소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표시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의 시야는 온통 새로운 곳으로 보여, 귀가보다는 새로운 어딘가로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어딘가 익숙한 이 공간이 자신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이륙하기 직전까지의 피곤함은 꼭 쥐고 있던 휴대폰을 놓치기에 딱 좋았다. 아직 땅을 뜨지 않은 기체 안에서 이제 곧 돌아갈 거라는 연락을 남긴 채 뻐근해진 발목을 애써 두어 번 눌러보고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이 손을 털고 시트에 몸을 묻어버렸다. 새카만 아스팔트는 이른 아침의 밝은 햇빛조차 삼키며 저 멀리까지 쭉 펼쳐져있었다. 이걸로 휴가도 끝이네, 라는 마음이 닛타 미나미의 마음을 더욱 그곳에 묶이게 했다. 그녀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애써 올리며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지 흔들리는 기체 안에서 자신을 지나는 활주로를 응시했다. 며칠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라는 바람은 어쩔 수 없다, 라는 현실로 덮어버린 채 돌아가 연인에게 보여줄 영상을 찍을 준비를 했다.

"아, 이제 뜨는 건가 보네."

 활주로를 달리는 기체의 속도가 올라가자 시야에 들어오는 아스팔트들은 더욱 빠르게 미나미의 시야각에서 벗어나고 들어오고를 갈아 반복했다. 시트에 파묻은 몸에 하중이 가해지는 것을 느끼자, 곧 이륙할 것이라는 생각에 동영상 버튼을 눌러 그 시야각을 담아냈다. 이윽고 비행기가 땅을 박차 떠올랐고, 그곳에 아쉬움과 후회가 행여 남았을까, 미나미는 고개를 저어 마음을 단단히 바로 잡아챙겼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온 것이다. 휴가를 신나게 즐기지 못한 스스로에게 더 무리를 해서라도 알차게 보냈어야 했다는 모진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 대한 후회는 지금 당장은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금세 접어버리고 방금 찍은 이륙 동영상을 보았다.

Большое хорошо…!

 신기하다는 듯이 휴대폰을 받아들어 영상을 가만히 바라볼 아냐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잠시 웃음이 걸렸다. 그동안 연인이 생각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자리에 함께 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의 생각이 더 자주 났지만 사실상 각자의 스케줄로 인해 함께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의미없는 아쉬움은 접어두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려 했다. 하지만 어째 휴가 내내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아 시간을 낭비했다, 라는 생각이 여행 내내. 그리고 지금 이곳을 뜨는 순간까지도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효율성 없는 휴일을 보낸 것일까, 라고 생각하다가도 쉬는 것에 효율성을 따지는 것이 옳은 것일까, 라는 생각이 금세 그 전 생각을 잡아먹고 그것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 속을 어지럽혔다. 그저 연인의 따스한 포옹이 그리워졌을 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멀리까지 휴일을 보내러 나올 필요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쓴 입맛을 다셨다.

"이제 곧 같은 곳을 밟고 서로를 마주할 수 있겠네. 그렇지, 아냐쨩?" 

 길지도 않았던 휴가 기간동안 얼마나 많이 연인을 생각한 것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좋은 풍경을 볼 때면 그 근처에 앉아있던 연인들이 마치 자신들인 것처럼 보였고, 맛있는 식사 앞에서는 그걸 떠 상대의 입에 넣어주는 생각까지도 했다. 무거운 발 걸음을 옮겨 돌아온 숙소에서 신발을 벗기가 급하게 직선으로 침실로 연인을 밀고 가 포근한 하얀 이불 위에 풀썩 쓰러지는 상상도 해보았다. 같은 숙소에서 같은 세면용품으로 씻은 둘은 분명 같은 향이 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도 했다. 그저 상상에 그쳤을 뿐이라는게 휴가 중인 미나미의 마음을 붕 띄워놓고 앉을 곳 없게 했을 뿐이다. 잘 지내고 있을까, 무슨 일은 없었을까. 아냐는 스케줄이 비는 동안은 틈틈이 연락을 보내주었지만, 직접 함께 하지 못하니 그런 연락만으로는 아냐의 표정이 쉽게 떠오르지 않아, 괜찮다는 말에 정말 괜찮은게 맞을까 라는 불안함도 가졌다. 솔직하게, 미나미의 휴가는 완전히 망가져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휴가를 보냈음에도 더욱 피곤해진 머릿 속을 애써 저어버리고 눈을 감았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서서히 그 안을 정리하고 가득채워갈 쯤 자신의 앞으로 나온 기내식을 받아들어 무심하게 입에 밀어넣었다. 지금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저 돌아가고 싶다 라는 생각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지칠 스스로의 모습도 떠올렸다. 대체 어느 박자에 맞춰 기분을 정해야 할 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 아. 하늘 이."

 찌푸린 시야 사이로 햇빛이 밝게 들어왔다. 앞쪽 창에 하늘이 비치는 것을 보고, 바로 옆 내려둔 창의 가림막을 올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온통 새파란 하늘. 저 너머 어디까지고 펼쳐있는 하얀 구름띠는 멀면 멀 수록 하얗기도, 어찌보면 회색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한참 아래로 보이는 도시들은 점점 멀어져 더욱 작게 보이고, 부드러운 천을 가볍게 쥐어놓은 것인냥 둥글게 솟은 산과 산들이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미나미는 대충 우겨넣은 밥을 천천히 씹어넘기며 휴대폰을 들어 그 광경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시선 아래로는 얇게 불투명한 구름이 빠르지만 눈에 잡힐 정도로 흘러가고, 이어 멀리 있던 눈 덮인 산이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의 새로운 모습들에 미나미는 사진을 찍던 휴대폰도 내려둔채 먼 푸른 하늘을 계속 응시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그 푸른 빛은, 새로움이라는 신비를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낯이 익었다. 드문드문 둥글게 뭉친 하얀 구름덩어리는, 연인의 푸른 눈동자에 닿는 하얀 태양빛과도 닮아있었다.

"이제 곧, 만날 수 있어. 나의 휴식처 "

 너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더욱 강하게 미나미의 마음을 지배해갔다. 기존에 있던 곳을 떠나고 싶다는 일탈감에 나온 타지는 오히려 자신을 지치게 했고, 돌아가는 순간의 땅은 휴가에 대한 아쉬움을 점점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 마주한 하늘이 자신을 너무나 가볍게 안아들어주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연인을 안고, 또 연인에게 안겨있을 스스로를 떠올렸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을 밟고 이 푸른 하늘을 그 두 눈에 담고 자신을 봐줄 아냐가 떠올랐다.

"앞으로 35분 정도려나."

 미나미는 그제서야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가볍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도착 예정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시트 속 화면에 비친 도착지를 톡톡 두드렸다. 아직 아무 통신도 되지 않는 휴대폰의 화면을 켜 잠금 화면에 걸린 두 사람이 손이 담긴 사진을 바라보았다. 분명 잘 지내고 있을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내리면 바로 전화부터 하고 싶어졌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내일부터 시작될 스케줄까지 조금 더 쉬고 싶어졌다. 내일이 찾아올 그 단 몇 시간이 요 며칠의 휴가보다 더 포근하게 찾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차올랐다. 꺼진 휴대폰 화면에 비친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언제부터인지 웃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 신기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당연스러웠다. 쉴 수 있는 곳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는 걸 미나미는 재차 깨달았다.

 돌아가야 할 곳. 쉴 수 있는 곳.
 
 전화하면 가장 먼저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아주 짧게 고민해보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뻔한 말이라도 반기며 들어줄 연인의 모습이 떠올라 또 가볍게 웃음이 나왔다. 손에 걸린 반지가 오늘따라 더 눈에 띄었다.

 다녀왔어, 보고싶었어. 아냐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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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

2차/데레마스 2016. 5. 3. 00:16

페트



2016-05-02


미나(미오)아이

닛타 미나미x타카모리 아이코(x혼다 미오)






 아주 평범한 오후다.

 함께 하게 된 유닛의 멤버들은 연습이 끝나자 제각기 갈 길을 찾아 연습실을 떠났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이후 스케줄은 딱히 없다는 것이 떠올랐기에 귀가할까, 싶었지만 느지막이 공기를 데우며 서서히 떨어져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비어버린 느낌이 들어 프로덕션 건물 근처의 벤치에 등을 기대고 살며시 고개를 젖혔다. 


"해."
"ㅡ에요. 괜찮답니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대화. 귀갓길이기에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달리 한 사람의 나긋한 목소리만큼은 곧바로 구분이 되었다. 요 며칠 내내 연습실에서 함께 한 그 아이의 목소리. 트레이닝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길게 대화한 적이 몇 없었지만, 한 번 대화한 내용만큼은 어째서인지 바쁜 머릿 속에서 여유로이 자리를 잡고, 저녁 노을을 등지고 가는 귀갓길마다 한두 번씩 의식 위로 떠오르곤 했다. 가만히 떠오른 그것에 집중하면 나는 어느새 귀갓길의 끝자락에 닿아있게 되는, 그런 느긋함이 밴 목소리. 

"돌아가는 모양이네."

 바람을 쐬며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연습의 열기는 이미 식어버리고, 지쳐버린 무게감이 나를 꾹 하니 누르고 있었다. 저 너머 건물을 나서는 두 사람은 오늘도 여전히 밝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늘상 보는 그런 장면. 아이코가 신 유닛에 참가하게 된 후로는 미오가 아이코를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헐레벌떡 달려온 듯한 오늘의 모습은, 분홍 져지 상의가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였고, 그 한 손은 아이코의 하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휙 하니 고개를 돌려버리고 얼굴을 붉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맞잡고 수줍게 하루를 정리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열심히 그 둘을 응원해주던 사람들, 몰래 도와주려고 이리저리 뛰던 사람들, 그리고 우물쭈물대며 린에게 도움을 구하던 미오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코를 마주한 나. 문득 여러 사람들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다가, 아이코라는 아이를 상상하던 내가 떠올라 가벼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분명 굉장히 상냥하고, 나긋한 아이였지. 미오쨩의 이야기에서는."

 그리고 직접 함께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을 신경쓰지 않게끔 나를 감싸주는 듯한 따스한 목소리. 혹여라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갖은 고민을 하는 듯이 천천히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서두르지 않고 나긋하게 떼는 발 걸음. 


"오, 오늘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아쨩."
"으응, 이 정도는 별 거 아닌걸요. 미오쨩이 찾아와주는데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익숙하게 물병을 건네는 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 미오를 찾아오던 아이는, 미오의 연습이 끝날 때까지 쭉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온기를 품은 주홍의 햇빛이 그 등을 너머 미오에게 닿았고, 나는 그 햇빛을 등지고 앉아 그보다 따스하게, 하지만 데이지 않을 온화한 온도로 미오를 바라보던 아이코를 기억한다. 미오가 연습이 끝난 후 바로 찾아올 수 있게 아이코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한 순간은 잠시 자리를 떴나, 했는데 이어 다시 같은 자리를 찾아 앉고, 미오의 연습이 길어질 수록 아이코가 자리를 잠시 비우는 경우도 잦아졌다. 


"신기하다니까 아쨩이 챙겨주는 이 물, 항상 시원해!"
"후후 그런가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눈치채게 되었다. 아이코가 익히 건네는 그 물은, 혹여나 미오가 갈증이 날까봐 챙기던 물이였다는 것을. 갈증을 달래줄 시원함이 가실 때마다 매번 매점으로 돌아가 시원한 새 물로 바꿔온다는 것을. 오늘의 물도 역시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 그녀에게 건넬 물도 그 배려를 닮아 천천히 상대의 갈증을 흘려보내줄 것이다.

" 후우.."

 어째서인지 둘을 보니 더욱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 이유를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체 하고 싶었다.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벤치에 몸을 널다시피 기댔다. 손 끝, 발 끝이 하나같이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열기는 식었지만, 그 자리를 바짝 쫓아 갈증이 가득 채웠다. 그래도 손가락 하나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이어 들리던 그 목소리마저 저 멀리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늦장 부리는 햇빛도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까만 밤이 찾아오면, 나는 그제서야 자리를 뜰 수 있을것만 같았다. 

" "

 텁텁하게 두어 번 간신히 침을 삼켜보았다. 요즘들어 바쁜지 함께 식사조차 하지 못하는 아냐가 떠올랐다.

"미나 "

 그러다가도 금방 머릿속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지친다는 것은 이렇게도 사람의 머릿속마저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라는걸 실감했다. 그저 평소와 같은 오후일 뿐인데도, 어째선지 오늘은 더욱 지쳤다. 그것은 분명ㅡ

"미나미씨 ?"
"아이코쨩?"

 살짝 상체를 숙인 채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나의 안색을 살펴보던 중이였는지, 내가 눈을 뜨자 시야에 금방 그 두 눈이 들어왔다. 

"물, 마시겠어요? 너무 차진 않을거예요."
" 물? 아, 응. 고마워."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춰있었던 것 같다. 
 다시 사고가 정리되어갈 쯤에는 아이코는 자리에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까보다도 더 햇빛은 가라앉아 있었고, 나의 손에는 물병이 들려있었다. 연분홍 체크무늬가 그려진 하얀 손수건으로 싸인 페트병은, 냉장고에서 막 꺼내진 억지스레 시려 손을 차게 하는 온도가 아닌, 갈증을 날리는데 필요할 만큼의 딱 적당히 시원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손수건 덕에 손도 젖지 않았지만, 한 순간 시원한 물병보다도 어째서 이것이 손수건에 싸여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도 따스한 배려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한 손에 들린 물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뚜껑을 열어 두어 모금 마셔 넘겼다. 입 안을 적시며 흘러들어가는 물은, 평소보다도 더욱 시원하게 갈증을 녹여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녹아버린 갈증은, 저 너머에 스며 아마 당분간은 고개를 내밀 것 같지 않았다.

"손수건, 세탁해서 줘야겠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를 언제까지고 끌어당길 것만 같던 콘크리트가 드디어 놔준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채 가벼워진 무게감을 느끼며 물병을 싸고있던 손수건을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네."

 생각보다 이르게 자리를 뜨게 된 것에 왜인지를 곱씹지는 않기로 했다. 그저, 내일은 유닛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주제로 말을 건넬 구실이 생겼다는 것에 대해 한 켠으로 웃음이 지어졌을 뿐이다.
 
 걸음을 옮겨 프로덕션을 나왔다. 

 손에 들린 페트 속 물이 나의 걸음에 맞춰 찰랑이며 다시 따스해진 손을 간질였다. 어딘가 상냥한 그 시원함은, 결코 내 온기를 빼앗아가지 않았다. 이 정도는 나도 받아도 괜찮은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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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

2차/데레마스 2016. 3. 3. 22:57

리본

 

 

2016-02-18

 

자공자수

닛타 미나미

 

랜덤연성 배정 커플링, 키워드.

@Deremas_random

 

 

 

 

수줍은 듯 하면서도 선명한 붉은 리본은 나의 이 새끼손가락 끝에, 그리고 저 너머의 당신의 손가락 끝에 걸려, 인연이라는 것을 선물해주듯 늘어뜨려져 있었다.


"요즘엔 꽤나 기분이 좋아보이네요, 미나미쨩."
"아, 미나미. 좋은 일… 있습니까?"

"으응. 별 일은 없지만 기분은 좋아요. 항상."

 카에데씨와 아냐는 요즘 들어 나의 안색이 부쩍 좋아졌다, 라던지. 좋은 일이라도 있냐, 던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런 그들에게 나는 가벼이 웃어보이며 별 일은 없다고 대답해주는 것 또한 최근의 일상 중 하나가 되었다. 

 정말로 별 일은 없다. 정말로.



"다녀왔습니다."

 프로덕션에서 돌아와 들어선 집은 오늘도 조용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몸을 누인 채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잘 들어갔냐는 아냐의 연락. 내일 다시 보자는 카에데씨의 연락. 스케줄 변동이 있을 수도 있으니 대기해달라는 프로듀서의 연락. 잠잠해졌나, 싶으면 다시 울려대는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젓고 미미하게 울리는 진동의 소리도 듣고 싶지 않은 기분에 전원을 꺼버리고 툭 하니 옆에 내던져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과격한 방법이였고, 어쩌면 꼭 연락해야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을 하다 다시 휴대폰을 집어들어 전원을 켰지만 그 후로 전화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귀가 후에는 조용하게 내 시간을 갖고 싶으니까… 미안해요, 다들."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그대로 누워있는 이 시간이 꽤나 나른해서 팔을 올려 눈을 덮어버렸다. 조용한 가운데 들려오는 소리는 신경에 거슬리게 째깍이는 시계의 작은 초침소리.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을 느끼고 애써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니, 이어 두근두근 하고 고동소리가 느껴졌다. 들려온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하게는 느껴진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소리였다. 

 조용한 방. 오직 혼자뿐인 그 공간에서 왠지 평안하게 울리는 고동에 손을 얹어보니, 문득 오늘 귀가길에 거리의 문구점에서 산 리본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아마 이쯤 넣어둔 것 같았는데… "

 정말로 단순한 그저 문구 장식용 리본. 약간 반짝이는 듯이 매끄러운 긴 리본을 꺼내들었다. 지친 귀가길, 어째서인지 문구점의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리본이 즐비한 진열대가 눈에 띄었다. 무심결에 들어간 가게 안에서 마땅히 선물할 것도 없는데 집어들어 계산하게 된 이 붉은 리본. 둥글게 말려 감겨있는 리본의 끝을 툭 푸니 아주 길지만은 않은 길이가 스르륵 떨어져 내려갔다. 무작정 사 온 리본을 어디에 쓸 지 고민하며 역시 장식용이 좋을까, 싶어 이곳저곳 둘러보는 와중에 방 안에 남겨져있던 나의 연인과 마주했다. 

"…… 아. 다녀왔어요."

 어색하게 미소짓는 나의 연인은, 나의 인사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모아 마주 인사해주었다.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누워있다 일어난 것인지 약간 헝클어져있는 머리를 쓸어넘겨주고 싶어 손을 뻗었다.

"아차. 당신도 저를ㅡ"

 동시에 손을 뻗어왔다. 손 끝과 끝이 아주 살짝 닿아, 잠시 차가움이 전해지자 바로 손을 뗐다. 당신과 나는 똑같이 놀란 눈을 했다가, 이어 당연하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나는 슥슥,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했다. 너머로 본 당신의 모습 역시 말끔해졌다.

"오늘은 말이에요ㅡ"

 잠시 시선을 구석으로 돌려 짧게 들이 쉰 숨을 길게 내뱉고 말을 텄다.
 
 오늘 있었던 일. 항상 그 날 있던 일을 이렇게 나의 연인 앞에서 하나하나 풀어두었다. 속상했던 일, 힘들었던 일. 이런 저런 정리할 수 없는 일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조심스레 당신에게로 시선을 올리면, 당신 역시 나를 복잡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봐주었다. 그런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다, 같이 속상해주고 함께 힘들어해주는 그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속상해, 애써 웃어보였다. 그러면 나의 웃음에 당신도 애써 웃어주었다. 너머의 당신 역시 힘들었을텐데, 이렇게 나의 지친 마음을 이해해주고 온전히 공유해주는 당신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사랑스러워서 그 얼굴에 슬픈 표정을 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 깜빡할 뻔 했어요. 오는 길에 샀거든요, 이 붉은 리본."

 어떤가요? 하고 배시시 웃어보이니, 나의 연인 역시 그게 마음에 드는 듯 수줍게 웃어주었다. 리본에 어울리는 장식할 곳을 찾던 생각이 갑자기 닿더니, 시선이 반짝하고 나의 연인과 마주쳤다. 

"이거, 역시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떤가요?"

 한 손으로는 버거운 리본묶기였다. 조금 도와준다면 기쁠텐데, 하고 너머의 연인을 힐끔 바라보았지만 마주한 그 눈을 보자, 가벼운 코웃음이 났다. 당신의 옆 벽에 손을 대 보기도 하고, 입을 동원해 보기도 하여 그 붉은 리본은 나의 새끼손가락 끝에 간신히, 어색하게 묶이게 되었다. 

"그리고, 테이프."

 잠시 데스크에 가 문구 용품을 모아둔 서랍 칸을 열어 잘 정돈된 문구류에서 투명 테이프를 꺼냈다. 너무 길지않게 끊어낸 투명 테이프를 들고 다시 연인의 앞에 가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 리본, 예쁘지 않나요? 게다가 붉은 색. 이걸, 이렇게 하면ㅡ"

 차가운 거울면에 리본의 끝을 가져다 대고 투명테이프로 붙여 고정시켰다. 

"붉은 실, 같지 않나요?"

 거울 한 면을 통해 리본은 우스꽝스럽게 이어진 듯, 끊어진 채 붙어있었다. 그 단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 속 스스로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한 없이 지쳐보이는 얼굴. 오늘 스스로에게 일어난 일의 무게가 자연스레 보여 공감하게 되는 모습.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숨겨온 나약한 표정이 보였다.

"… 오늘도 수고했어."

 그 너머의 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표정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자, 웃어야지? 미나미. 많이 힘들었던 건 알아. 하지만 이런 모습은 안 어울려요."

 차게 식은 거울 속 모습의 입꼬리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대고 천천히 옆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천천히ㅡ 웃어보였다. 마치 내가 거울 속 나를 웃게 하듯이.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다가 피식, 하고 조소를 내비쳐버렸다.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그 처절한 모습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입술에 닿는 차가운 감촉은 역시나 당연하게 가슴을 찔러왔다. 다시금 바라본 그 두 눈은 조금 전보다 더욱 젖어가고 있어 더 이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거울 속 스스로와 이마를 맞댔다. 

"괜찮아, 당신은 괜찮아요. 우리 내일도 힘내요."

 당신이 힘든 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너지지 말아줘.

 거울 속 맞잡을 수 없는 손에 아쉬움을 느끼지도 못한 채, 당연스레 그 손 위에 손을 맞댔다. 잔인하게 선명한 붉은 리본은 나의 이 새끼 손가락 끝에, 그리고 이 너머 당신의 손 끝에 걸려, 절대 마주할 수 없는 인연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듯이 어색하게 끊긴 채 투명 테이프로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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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2차/데레마스 2016. 3. 3. 22:57

커피

 

 

2016-02-13

마유나오

사쿠마 마유x카미야 나오

 

랜덤연성 배정 커플링, 키워드.

@Deremas_random

 

 

 

 

 

 자주 가는 패스트푸드점의 최근 시리즈는 풀봇코쨩이였다. 햄버거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카렌에게 햄버거를 사주겠다는 말을 했더니ㅡ

"흐응… 나 혼자 햄버거를 먹을 수는 없는데."

 라며 바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일을 보내듯 화면을 두드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오까지 얻어먹겠다며 연습실에 처들어온 통에 지갑은 두 배로 얇아질 위기에 처했다. 추가된 몫까지 해서 어린이세트를 두 개 시켰다가는 카렌에게 본질이 피규어였다는 것을 들킬 것 같아, 아쉽지만 오늘의 풀봇코쨩은 하나로 만족하기로 하고, 하나는 일반 햄버거세트를 시키기로 했기에 묘하게 손해보는 느낌도 났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다녀와- 라는 말을 하며 나를 봤고, 어째서 나 혼자만 가야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쪽이 풀봇코쨩을 데려오기에는 편할 것 같아 선심쓰는 척 하며 서둘러 다녀왔다.
 
 냉랭한 연습실 바닥 위에 대충 펼쳐둔 내 져지 위로 재잘대며 신나게 햄버거세트를 펼치는 두 사람을 보고 천천히 뒤로 걸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카미양, 오늘도 피규어?"
"응, 그렇지 뭐. 풀봇코… 였던가?"
"역시 카미양은 귀엽네!"
"그렇지?"




 연습실 근처 로비로 나왔지만 어째 보는 눈들이 꽤 있어, 풀봇코쨩을 감상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뒤로 감춘 풀봇코쨩을 소중히 감싸쥐고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누군가 톡톡, 하고 어깨를 건드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짐작이 갈 만한 사람이지만 돌아보지 않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싸한 분위기를 연출하게 되어버려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레 몸을 틀어 그 사람의 짙푸른 눈을 마주했다.

"…아, 돌아봐주셨네요. 나오씨가 이렇게 봐줄 때마다 마유는 기쁘답니다."
"……으, 응… 그래."

 간격을 두고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하다가 겨우 꺼낸게 고작 버벅이는 대답이였는데도 만족한 것인지, 마유는 반쯤 뜨인 눈으로 호를 그리며 웃음짓고는 뒷짐 진 내 한쪽 팔에 자연스레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나를 이끌었다. 나는 차마 뒤로 숨긴 풀봇코쨩을 앞으로 돌려 가져오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마유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햄버거세트가 식사였나요?"
"………아… ……응. 뭐어…"
"안된답니다, 그런걸로는. 매번 그런 식단이면 몸이 상해버려요."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끌려 들어간 사무실은 비어있었다. 마유는 사무실에 들어서자 팔짱을 풀고 내 뺨을 쓸고는 후후, 하고 웃어보이며 걸음을 옮겨 전기포트의 전원을 올렸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이 올라가는 소리가 퍼졌고 나는 오늘도인가, 싶어 터벅터벅 테이블 앞으로 가 풀봇코쨩을 소중히 내려놓고 맞은편 소파에 앉아 몸을 뒤로 기댔다. 

"으헤… 프릴 구현도가 훌륭해. 이 정도면 모을 가치가 있다고. 역시 풀봇…… "

 테이블 위에 둔 풀봇코쨩을 가만히 보다가 무심결에 머릿속으로 생각해야 할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렸다. 무의식이라는 건 대단하다. 말을 뚝 끊고 살며시 시선을 올려 포트 앞의 마유를 살폈다. 역시 못 들은건가, 싶어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던 찰나 마유는 몸을 천천히 돌려 나를 보고는 빙긋 웃어보였다. 그 순간, 집 장식장에 서 있는 어느순간 어딘가 한 군데씩 부러져 다시 붙이는데에 무던한 노력을 쏟은 풀봇코쨩들이 떠올라, 테이블 위의 풀봇코쨩을 나의 옆 자리에 고이 가져다두었다. 이 녀석은 무사해야 할텐데. 하며 풀봇코쨩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다가 자그맣게 들려오는 발 소리에 크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풀봇코쨩은 없는 여자인 것이다.

"여기, 커피랍니다. 오늘은 조금 달게 해봤어요."
"…매번 이런 거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나오씨가 기쁘게 마셔주니 매일같이 해드리고 싶은걸요."
"내, 내가ㅡ"

 내가 언제! 라는 말이 다 뱉어지기도 전에 내밀어진 커피의 미미하게 들큰한 향이 코 끝을 간질였다. 어찌 되건, 마유의 커피는 하루 피로를 녹이는데 아주 훌륭한 효능을 보인다. 다만 그 커피가 씁쓸한 날은 무언의 각오를 해야한다는 날인 경우가 있다는게 흠이긴 하지만. 힐긋 본 마유는 늘 내가 자신이 타온 커피를 먼저 마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잘 마실게, 라는 말을 꺼내기가 간지러워 볼을 슬쩍 긁적이고 찻잔에 입을 대 오늘의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제서야 마유는 내 옆 자리의 풀봇코쨩을 아주 자연스레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앉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풀봇코쨩이 밀렸을 때, 주춤하며 잔이 흔들렸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어서 마유의 찻잔 옆에 나의 찻잔을 내리고 애써 마유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괜찮으신가요?"
"…응. 그…"

 마유는 옆에 밀어둔 풀봇코쨩을 테이블 위로 올려두고 내 어깨에 기대왔다. 실려오는 무게에 천천히 몸이 굳어갔다. 전방으로 향한 시선에 마유가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마유는 풀봇코쨩을 보고 있는게 확실해서 이 사람 앞에서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은 아니지만… 아무튼. 다른 여자를 보며 히죽거리던 것에 대해 어떻게 변명해야 할 지 머리를 굴렸다. 달게 했다던 커피에서 씁쓸한 끝 맛만 강렬히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또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이야기했나요?"
"역시 오늘도 말해야 하는거야?!"
"마유의 생각은… 얼마나 하셨나요?"
"엑…… "

 나긋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심지가 콱 박혀있는 것 같았다. 씁쓸한 향이 퍼지는 잔을 바라보다 설탕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며 자리를 떴다. 등 뒤로 꽂혀오는 시선이 마냥 달지만은 않아서 목덜미를 쓸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커피는 설탕을 아무리 넣어도 달 것 같지 않다. 

 "어서오세요. 할 이야기가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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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데레마스 2016. 3. 3. 22:55

you're star shine on me

 

 

2016-01-22

닛타냐

닛타 미나미x아나스타샤

 

 

 

 

 

"하아, 지쳤을지도ㅡ"

 

 기세좋던 체력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건물을 나선지 얼마나 되었다고 발걸음이 그 앞 큰 도로에서 착하니 달라붙어버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밤 하늘은, 오늘도 맑게 캄캄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카에데씨."
 프로덕션 건물을 함께 나선 카에데씨는 여전히 나에게 술자리를 권했다. 그 모습은 2주동안 점차 장난스러움에서 진지함으로 바뀌어갔고,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나는 웃음을 띄고 바라보다 정중히 거절을 표하며 고개숙여 인사했다. 카에데씨는 못내 씁쓸한 표정을 보이며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주고는 수고하셨어요, 미나미쨩. 이라는 인사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들고 있던 악보를 가방 속에 잡히는 책의 사이에 적당히 끼워두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새로 받은 곡을 틀어 머릿속에 낯선 음을 새겨넣으며 가벼이 발걸음을 뗐다.

 며칠 전, 어느 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뿌연 잿보랏빛의 하늘을 봤다. 도로를 달리던 차량의 인위적이게 밝은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의 주황빛 불이 섞인 그 날 밤. 가슴을 찌르는 먹먹한 공기에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했던 그 하늘. 그 날 이후로 어째서인지 하늘은 오늘까지도 깨끗하게 개여있는 상태로,  ​제각기 빛나는 별들을 담은 채 나에게 선물같은 시간을 주고 있다.

 오늘도 여전한 그 가로등 불빛이 쿡 하고 파고드는 것만 같아서 거리를 오르는 걸음을 떼 인적이 드문 공원 길을 향했다. 예전과는 다르지만, 이렇게 공원길을 에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무거우면서도 따스하다. 그 길 위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음들을 하나씩 풀어가며 가볍게 밟아갔다. 몇 사람 다니지 않는 공원은 최소한의 조명만으로 겨우 앞 길을 비춰주고 있었고, 나는 그 길을 익숙하게 따라가며 새카만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손이 닿지 않는 까마득한 거리의 밤 하늘은 숨 막히게 어두우면서도, 얕게. 탁 트인, 눈을 뗄 수 없는 넓이를 보여주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도쿄의 밤 하늘은 그다지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몇몇의 빛나는 것들을 짚어가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떠오르는 기억들이 마냥 싫지만은 않아 입가에 웃음을 걸었다.

"… 저 별, 이름이 뭐였지?"

 얄팍한 하늘의 틈에 던진 질문을 향한 대답이 조곤조곤 귓가로 들려오는 듯 했지만, 그 목소리를 애써 잡아보려해도 잘 들리지 않았다.
"미안, 잘 기억이 나지 않네."
 등 뒤로 불어오는 밤 바람이 덥게 지쳐있던 몸을 싸하게 훑고 지나갔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잠시 자리에 서 깊이 숨을 들이쉬었고, 한 가득 들어온 차가움들은 머리를 감싸 식혀주고 뜨거운 숨이 되어 내뱉어졌다. 입 밖으로 퍼져나가는 하얀 입김은 밤 하늘에 닿아 금방 녹아 사라져버렸다. 그걸 가만히 보다, 멀리서 반짝하고 유독 빛나는 하얀 별을 손을 뻗어 잡는 시늉을 했다. 잡히지 않을 별임에도 그 허공에 손짓을 하다, 차가운 공기만 잔뜩 움켜쥔 손을 가슴 앞까지 당겨 소중히 붙잡았다.


"오늘도 반짝반짝, 정말 아름다운 별이네."

 때마침 바뀐 노래는, 새카만 밤 하늘에 성운을 그려내는 맑은 푸른 빛의 목소리를 전해주었다.



 점차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간신히 옮겨 도착한 기숙사. 

 잠겨있지 않은 방 문고리를 잡아돌려 들어가니, 아침에 열고 간 창을 넘어 까만 밤 공기가 가득 찬 방이 나를 맞이했다. 더는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이 방은, 나의 억지로 인해 그 날 이후로도 계속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방을 그대로 내가 쓰고 싶다, 라고 우겼던 그 날 후의 내가 떠올라 씁쓸하게 마른 침을 삼켰다. 

 방에 불을 켤 필요는 없었다. 창가에 앉은 밤의 빛은 적당히 은은하게 방을 비춰주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온 몸이 바닥을 향해 쏟아져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지런히 책이 쌓여있는 아냐의 데스크에 가방을 올리고, 오늘 서점에서 무심결에 계산까지 해버린 천문잡지를 꺼냈다. 

"내일, 거기까지 가져다 줄 시간이 있으려나? "…… 좋아하겠지?"

 밤 하늘을 담은 붉은 테두리의 잡지 표지를 손 끝으로 매만지다 그 끝을 잡고 사라락, 자연스레 페이지를 쏟아냈다. 까맣고 어두운 우주. 그 공간을 수 놓는 푸르기도, 붉기도, 하얗기도 한 제각기의 별들이 담긴 사진. 아냐가 매 월마다 사 보는 이 잡지. 나는 그 페이지를 눈으로 스쳐 훑다가, 사이에 끼워져있던 새 곡의 악보가 빠져 나오면서 눈에 띄자, 탁 하고 잡지를 덮어버렸다. 이제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신곡의 멜로디를 넘겨버리고, 오늘 하루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를 틀었다. 

 두어 걸음, 책상에서 발을 떼니 도착한 침대. 여전한 이불. 더 이상 둘이 함께 있던 온도를 갖지 못하게 된 이 장소. 식어버린 바닥에 주저앉아 침대 위에 엎드리니 차가운 폭신한 감촉이 볼에 닿았다. 그 감촉에 얼굴을 파묻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어두운 밤 하늘, 요 사이 유난히 빛나보이는 한 하얀 별을 차분히 눈에 품고 팔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가져다 둔 아냐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간신히 붙잡아 그 시선 앞까지 가져왔다. 사진 속 아냐는 투명하고 어딘가 애처로이 나를 푸르게 보는 것만 같아, 그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고 당연스레 나의 입술에는 차가운 유리의 감촉만 닿았다.

"다녀왔어, 아냐쨩."

 사진 속 아냐의 볼을 가만히 문지르다 밤 하늘을 향해 눈을 돌렸다.


Вы звезда, блеск на меня.
You are star, shine on me.

 언젠가 나를 향해 웃어주며 말하던 그 노래의 제목은, 어느새 내가 읊게 되었다.

 새까만 밤. 시릴텐데도 하얗게 맨 발로 서서 이곳을 향해 투명하게 빛나고 있는 아냐를, 나는 이 하늘 아래에서 아직까지도 놔주지 못한 채 손을 뻗고 있다.

아냐가 하늘에 박혀버린지 벌써 14일째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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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카에나나

타카가키 카에데x아베 나나

 

 

 

 

 

"그래도 다행이네요… 우산, 사 두길 잘했어요."

 이맘때쯤 귀갓길은 붉으면서도 노란 따스한 노을이 거리를 적셨고, 그 거리를 타박타박 걸어 역까지 가는게 하루를 마무리 짓는 소소한 기쁨이라면 기쁨일 그런 시간이였을텐데도, 오늘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ㅡ 우중충한 잿빛의 귀갓길이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강수 확률이 있다는건 오늘의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일이라, 우산은 쉬는 시간에 편의점에 가서 하나 마련해 두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레슨받는 그 몇 시간동안 하늘은 캄캄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네요. 

 프로덕션 현관에 서 하늘을 바라봤답니다.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비가 내린지도 꽤 된 것 같아요. 이런 날이면 이따금 무릎이 시큰거려서 곤란하… 지만, 나나는 17세니까 그런건 중요하지 않답니다! 집에 두고 온 분홍 바탕에 하얀 토끼무늬가 그려진 우산을 떠올렸어요. 손에 든 편의점표 우산은 접이식. 아무리 임시여도 여고생이 들고 다닐 우산이니까 조금은 디자인에 신경써볼까 했지만, 그나마 괜찮은 디자인이였다는게 이 짙은 녹빛에 검정 격자무늬. 

"하아아… 뭔가 아버지의 우산같잖아요..?"

 여고생의 초이스라기에는 굉장히 누추해보이는 우산을 풀어 두어 번 털고 현관 밖을 향해 펼쳤습니다. 손잡이를 잡고 휙휙 몇 바퀴 돌려봤지만, 그런다고 디자인이 바뀔 일은 없겠지요. 

"우사밍 파워로 체ㅡ인지! … 가 될 리가 없나요?"

 김 빠지는 웃음이 새어나왔답니다. 우산대를 어깨에 턱 걸치고 프로덕션을 나섰어요. 비오는 거리는 생각보다 시끄럽답니다. 프로덕션 앞의 도로에 차가 다니는 소리도 빗소리와 섞여 더욱 크게 들려요. 물 웅덩이에서 차지게 물이 튀는 소리, 사람들이 저마다 웅성거리며 걸어가는 소리, 찰박거리며 달리는 소리ㅡ

"어라ㅡ 언니?"

ㅡ카에데씨의 목소리. 

"… 에?"
"여기 있었네요, 우ㅡ사밍! 언니."
"에, 네에… 돌아가는 길이니까요."

 그보다 언니가 아니라니까요!? 나나, 17세! 카에데씨는 저보다 연상이시라구요! 라고, 따박따박 끊어 말하며 카에데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요. 나나의 우산 높이에 맞추려 한 건지, 카에데씨는 엉거주춤 구부정한 자세로 무릎에 손을 올려 지지하고 옆에 서서는 나나가 가던 길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양 손에 가방은 커녕 우산조차 없기에 오늘 날씨를 예상하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는걸 눈치챘답니다. 

"톱스타시잖아요? 이렇게 비 맞고 다녀서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쩌려고 그러나요?"

 카에데씨를 마주하고 서 한 손에 우산을 들려주었답니다. 카에데씨는 엉거주춤한 그 자세에서 한 손만 들어 우산을 받은 채 나나의 눈을 빤히 바라봤어요. 

"언니, 손수건도 들고 다니시나봐요? 역시 현역 여고생은 다르네요."

 젖은 옷마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어서 주머니에서 토끼모양 자수가 작게 박힌 나나의 손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가 달라붙은 얼굴이라도 닦아주었어요. 카에데씨의 시선은 나나의 손수건을 따라움직이다가 나나의 움직임이 멈추자 다시 나나를 응시했답니다. 그리고는 빙긋, 눈을 감아가며 웃어보였어요. 

"그나저나… 이제 어쩔까요?"
"흐응… 어쩔까요?"

 근처 편의점에 가 우산을 하나 더 살까, 라는 생각에 주변을 휙휙 둘러봤지만 당장 근처 거리에는 편의점이 없었어요. 그렇다고 이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게 하며 같은 우산을 쓰고 가게는 할 수 없고. 나나의 고민을 함께 해 나눠주려는건지, 생각을 안 하고 있는건지 카에데씨는 그저 능청스럽게 빙글빙글 웃더니 갑자기 확 일어나버렸어요. 

"에잇ㅡ"
"꺄!? 자, 잠깐만요!? 그렇게 우산을 올리면 나나가… !"

젖어버린다구요ㅡ라고 말을 뱉어내기가 무섭게 굵은 빗줄기가 나나의 치맛자락을 적셔버렸어요. 황급히 치마를 털어내지만, 빗방울은 이미 스며들고, 번지고, 계속 내려앉았어요. 한숨을 푹 쉬며 그렇게 예고도 없이 일어날 정도로 허리가 많이 아팠던 모양이네요. 라고 생각하던 찰나ㅡ

"… 후훗."

 카에데씨는 노렸다는 듯이 남은 쪽 손을 입 앞에 갖다 대고는 빗소리에 은근슬쩍 웃음을 섞여보냈어요. 그런 카에데씨를 올려다보니, 이내 나나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몸을 숙여 우산을 나나의 손에 쥐어주었답니다. 

"한 우산을 저희 두 사람이 쓰고도 비를 안 맞는 방법이 있어요."
"굳이 한 우산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하나요… ?"
"이렇게 하면ㅡ"
"엣?!"

 흐읍, 하는 소리와 함께 카에데씨는 우산을 든 나나를 안아올렸어요. 여고생의 로망, 공주님 안기를 이런데서나 당하게 될 줄은 나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전혀 로맨틱하지도 않아요. 아니, 이런게 중요한게 아닌가요?

"… 언니, 생각보다 많이 무겁네요."
"그, 그그그그런 말 막 하지 말아주세요! 여고생의 여린 마음에게 예의가 없으시네요!"

 카에데씨는 이어 빙글거리던 웃음기를 싹 걷어내고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주변을 돌아봤어요. 우산이 작기도 하지만, 안아올려졌을 때 버둥거린 탓에 나나의 신발과 다리는 완벽하게 비에 젖어버렸어요. 카에데씨는 무언가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려 나나의 젖은 치마와 다리를 훑어보고는 나나와 눈을 맞췄답니다. 

"저 때문에 많이 젖어서 어떻게 하지요, 언니?"
"…… 누누이 말하지만, 언니가 아니라 나나니까요. 나나가 더 연하니까요."

 이젠 고쳐주기도 지칠 정도예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한숨을 내쉬고 카에데씨를 봤어요. 어두운 거리, 우산 아래인데도 카에데씨의 그 눈은 빗방울의 빛을 모아 담은 것인지 반짝이며 각각 푸르고도 깊은, 어딘지 모를 따스한 온도를 담아 예쁘게 빛나며 나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말문이 점점 닫혀버려서 카에데씨와 나나는 몇 분 정도 그 상태로 서 있었어요.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도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에,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릿 속에 빗소리와 함께 섞여 시끄럽게 울려댔어요. 나나는 눈을 질끈 감고 빗소리라도 걸러들으려 고개를 저었지만 난잡한 건 여전했어요.

"미안해요. 그러니까, 옷이라도 말리고 가요."
"…… 네?"
"여기, 택시ㅡ"

  번잡한 소리 속에서 카에데씨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나나의 귓가를 파고 들었답니다. 당황스레 받은 권유에 눈을 떠 보니 카에데씨의 눈동자에 비친 나나는, 더욱 깊은 곳에 맺혀있는 것 같았어요. 그 눈을 가만히 보다 시선 옮겨버리니 눈에 들어 온 카에데씨 너머의 우산은 더 이상 칙칙한 중년의 디자인이 아닌, 갓 왕자님을 만난 공주님의 마음과도 같은 연하지만 확실한 분홍빛으로 보였답니다. 그리고 얼핏, 하얀 토끼무늬도 박혀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카에데씨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이고는 타박타박, 도로변을 향해 몇 걸음 걸어나갔어요. 그러자 신호는 타이밍 좋게도 초록불로 바뀌더니 저희의 앞에 차량이 한 대 멈춰섰어요. 카에데씨는 나나를 살며시 내려주며 손에서 우산을 받아들고 몸을 숙여 나나를 씌워주었답니다.

"자, 타요."
"… 예? 아, 네에… "

 카에데씨는 뒷 문을 열고는 나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어요. 그 손짓에 묻은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며 택시의 뒷 좌석으로 몸을 옮겼답니다. 이윽고 카에데씨도 우산을 접으며 나나의 옆에 타고는 문을 닫았어요. 그리고 아마도 카에데씨의 주소로 추정되는 곳을 나긋나긋 기사님께 말하고는 시트에 몸을 파묻듯이 기댔답니다. 

 
나나는 분명 퇴근을 하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카에데씨가 나나의 우산을 함께 쓰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나나는 옷이 젖어버렸고, 왠지 카에데씨가 택시를 잡아서, 어째서인지 카에데씨의 집에 옷을 말리러 가게 된 상황이 되었네요.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어요.

"잠깐만요, 카에데씨."
"네?"

 나나는 카에데씨가 앉은 근처의 시트를 톡톡 두드리고는 그 쪽을 향해 몸을 돌렸어요. 그리고 아직 채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열심히 헤집어가며 눈을 굴렸답니다.

"카에데씨, 오늘 우산 안 가져왔지요?"
"네, 안 가져왔어요."
"그런데 우산은 안 사고, 택시 탈 돈은 있었나요?"
"으음ㅡ"

 우산 없이 적당히 택시를 기다렸다가 온 택시를 잡고 귀가할 생각이였답니다. 라는 카에데씨를 보며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괜히 찾아온 위화감을 꾹꾹 눌러담으며 싱긋 웃어보였어요. 카에데씨는 그런 나나를 가만히 보다가 나나의 젖은 치맛자락을 살며시 잡아당겼답니다. 나나는 카에데씨의 그 하얀 손 끝을 의아하게 쳐다봤어요. 그리고 다시 본 카에데씨의 눈은 빙긋, 짓궂은 호를 그리며 웃고 있었어요. 

"게다가, 우산을 사 버리면 이렇게 적실 수도 없잖아요?"
"… 네?"

 무슨 뜻인지 의아함을 담은 되물음에 카에데씨는 시트에 묻은 몸을 일으켜 한 손, 한 손 짚으며 나나의 곁으로 숙여왔어요. 그 움직임에 나나는 왠지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렸어요. 

 함께 저희 집으로 가요, 나나쨩.

 그리고 녹아내릴 듯한 바람같은 목소리로 나나의 귓가에 속삭였답니다. 복잡한 생각이 뚝 끊겨버리더니 머릿 속은 온통 조용한 가운데 카에데씨의 목소리만 온전히 떠올랐어요. 굳은 채 바라 본 정면의 차 유리 너머로는 짜맞춘 듯이 온통 초록불이 켜져있었답니다.

 빗소리도, 웅성이는 소리도, 번잡한 생각도 전부 멈춘 채 택시는 유유히 번져나가는 초록 불빛의 거리를 달려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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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뱀인-외

2차/데레마스 2016. 3. 3. 22:53

늑대, 뱀파이어, 인간 AU - 외전

 

 

 

2015-12-22

카에닛타냐

타카가키 카에데x닛타 미나미x아나스타샤

 

본편과는 전혀 연관 없는 그저 뱀프 아냐가 보고싶은 마음에.

 

 

 

 

 

 나는 지난 그 순간, 그 때부터 뱀파이어에 대한 것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강함의 기준은 각각 달랐다. 뱀파이어의 경우 자신의 생존욕구가 강할수록, 늑대인간의 경우 타인에대한 수호욕구가 강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한다. 카에데씨는 일전에 하프들이 시작점이 다르다고 한 적이 있다. 태생부터 정해지거나 도중에 전환을 한 사람들에 비해, 하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지가 강할수록 그것과 맞는 선택을 했을 때 남들보다 훨씬 압도적인 힘을 갖게 된다고 했다. 더욱 이성적인 뱀파이어, 더욱 감성적인 늑대인간은 오직 하프에게서만 나온다고 했다.

"비겁하지요. 순혈보다 완벽하게 이상적일 수 있는 혼혈이라니."

 팔짱을 유지한 채 사무실 문 너머를 보는 카에데씨를 떠올렸다. 비겁하다고 하면서도 같은 진영에 아냐를 데리고 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꽤나 실책이 컸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종종 정보들을 알려주면서도 아냐나 하프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가늘어지며 입맛을 가시더니 물 한 모금을 꼭 찾았다. 그저 먼 세계의 이야기 같던 그것들이 내게 현실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아냐의 생존의지가 강할수록, 카에데씨의 편에는 절대적인 힘이 생긴다는 이야기. 하지만 아냐는ㅡ





 꼭 닫고 있던 눈꺼풀이 왠지 자연스레 떠졌다. 침대에 파묻힌 몸은 나른하게 무거웠고, 닫았다고 생각했던 창문이 열려있었는지 방 안은 밖의 차가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느릿하게 손을 올려 눈을 두어 번 문지르고 상체를 일으켰다. 이대로는 다시 잠들 수 없을 것 같아 창을 닫기로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Я дома."
"… 아, 다녀왔니? 아냐쨩."
"Да."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달빛이 내려앉은 창가에는 그 빛을 받아 유리가루가 뿌려진 듯이 반짝이는 피부를 보이는 아냐가 걸터앉아 있었다. 군데군데 구멍난 상처나 타들어 가는 잿빛의 상흔들을 보니 오늘도 사냥을 다녀왔구나, 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아냐는 언제쯤인가, 카에데씨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까지는 아직 인간이였던 아냐에게 카에데씨의 손길은 죽음까지 닿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로 위협적이였다. 목숨을 달아둔 협박에 흔들리던 아냐는, 스스로를 지킬 힘을 얻어 강해지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지킬 수 있게 될 거라는 카에데씨의 말에 적대적으로 대답을 정했고, 그에 카에데씨는 자신이 원치 않던 대답이 나올 것만 같아 힘으로 아냐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카에데씨의 손아귀에 잡힌 아냐는 시야가 닫힐 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지배했을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아냐는 CP의 거의 모두를 등지고 자신의 감정을 잃은 채, 카에데씨의 진영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치의 밤이 찾아올 때마다 카에데씨의 바로 뒤에 서서 사냥을 시작했다. 자신과 줄곧 함께 했던 동료들을.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

 눈에 띄게 아물어가는 상처들을 보면서도 나는 블라우스의 앞 단추들을 풀고 아냐의 곁에 다가가 그 어깨를 감싸안았다. 전과는 다르게 식어버린 차가운 몸은 오직 나만의 체온이 차가운 물체를 안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게 했다. 아냐는 두어 번 고개를 젓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목덜미에 닿는 그 숨결은 간지럽지도, 따스하지도 않아서 혼자만 뛰는 두근거림에 따갑게 바늘을 꽂는 것 같았다. 

"ㅡ윽… "
"아팠습니까?"
"… 으응, 괜찮아."

 일전에 카에데씨의 강함에 기댔던 날들을 떠올렸다. 지금보다는 훨씬 따뜻했던 것 같았던 기억이 지금 이 순간의 차가움을 더욱 뼈저리게 닿게 했다.

 카에데씨가 나를 필요로 했던 그 날들에서, 아냐는 나를 뺏어왔다. 그 날부터 진영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아냐는 독보적인 존재로, 카에데씨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아냐가 뱀파이어의 길에 들어서기 직전에 가장 마지막으로, 아냐의 소중한 사람이라는 존재로 마무리가 된 것 같았고 지나치게 생존에 치우쳐버린 아냐는 카에데씨가 말하는 이상에 닿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감성과 멀리 떨어진 아냐에게서 나는 두 번 다시 따스한 체온을 느낄 수 없었다. 

 크게 갈증조차 느끼지 않는 아냐는 내게 자발적으로 공급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불안함만 더욱 커졌다. 안전을 보장받은 순간, 나 스스로의 생존에 대한 문제보다는 아냐가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봐, 혼자만의 두근거림조차 용납받을 수 없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가득 차오르게 됐다. 후로 나는 어떻게든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무엇이라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대치 후의 아냐에게 부탁을 하듯 공급을 해주었다. 

"Спасибо."

 냉소한 감사의 표시가 흘러나오는 입술을 바라보았다. 나의 붉음이 아냐의 입술에 잔뜩 번져 있었고, 나는 그 식은 입술을 손 끝으로 매만졌다. 그 손길에 아냐는 입술에 번진 것과 같은 붉은 빛이 차오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무표정하게 나와 시선을 마주했고, 이내 지쳤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아냐쨩, 좋아한다고 해주지 않을래…?"
"Я вас люблю."

 나의 부탁에 늘 사랑한다고 응해주었다. 아냐는 기계적으로 녹음한 듯이 매번 같은 대답을 해줬고, 그것에라도 안도하고 싶은 불안한 나의 마음은 어디에도 내려앉질 못했다. 짧게 한숨을 쉬고 옮긴 시선에는 침대 머리맡의 화병에 눈이 갔다.

 억지로 꺾어다 둔 어린 피안화. 

 아냐가 제멋대로 어딘가의 화단에서 가져와 화병에 둔 붉은 꽃. 아냐는 그 꽃의 몸을 뚝 잘라버리고 꽃만 화병에 얹어두듯 두고는 그것이 시들시들해진 요 며칠까지 내내 꽃을 보고 무언가 중얼거렸다. 나는 팔을 뻗어 그 꽃을 잡아들어 가져와 아냐의 은빛 머리에 살며시 얹었다. 아냐가 어렴풋이 말해준 꽃말이 기억나질 않았다. 

"미안, 아냐쨩."
"Ничего."

 눈을 감은 아냐에게는 은 빛과 붉은 빛, 단 두 가지만이 눈에 띄었고 그 차가운 양 볼에 손을 올리고 나의 체온으로 아냐를 따스하게 잡아보았지만 손 끝 하나 움직여주지 않는 아냐에게 씁쓸함을 느껴 가볍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숙인 채 사과를 전했다. 

"미나미."
"응?"

 아냐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나를 불렀고, 고개를 들어 대답을 하니 그제서야 서서히 눈을 떠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푸른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누구보다 강해집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게 됩니다. 그럼, 미나미도 지킬 수 있겠지요?"





"ㅡ아……"

 우습게도 그 순간, 아냐가 내게 황금빛 눈을 빛내며 하던 말이 떠올랐고 나는 가식적이게도 아직까지 스스로를 약자라고 치부하는 무의식 세계에서 눈을 떠 일어났다. 끝나지 않던 밤 하늘은, 눈을 떠 보니 어슴푸레한 새벽이 찾아와 있었다. 

 목숨에 직접적 위협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고작 그 대기실에 있었던 시간들이 내게는 너무나도 두렵게 다가와 나는 란코의 조언에도 섣부르게 결정을 내려버렸다. 단 며칠만에 나는 스스로가 각인자라는 중한 사실을 넘기고 나를 지켜주겠다 한 아냐를 등져버렸고, 아냐는 카에데씨와 있던 나를 보고 더는 카에데씨에게 달려들지도 않았다. 살고 싶다던 나의 의지는 애석하게도 전환 직전에 아냐에게 미안함을 느낀 것인지 조금 사그라들어버렸고, 카에데씨는 후에 혀를 찼지만 진영 수가 늘었다는걸로 만족한다며 내게 웃어보였다. 

"목 말라… "

 전환 직후 아냐를 떠올려도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다. 이성적여진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막연하게 떠올랐고 나는 뻔뻔하게도 그 상태로 아냐를 만나러 갔다. 순식간에 사라진 나의 마음을 아냐에게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곁에만 있어달라던 아냐의 부탁은 나의 결정 이후에 다시는 내게 닿지 않았다. 

 방에 조그마하게 자리한 냉장고에서 란코에게 받은 음료를 꺼내들었다. 직접적으로 남에게 이를 꽂는 행위는 익숙하지도 않았으며, 그 간의 스스로가 떠올라 시도하지 못했다. 

"역시, 아무것도… "

 화단에서 꺾어 온 피안화를 보고, 그 옆의 우리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집어들었다. 사진 속 아냐는 나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 역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는 설레야 한다 라는 생각이 머릿 속에 맴돌 뿐, 두근거림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선택한 길의 과오를 무의식 중에 아냐에게 덮어씌워버렸고, 본인은 여전하게 보호받아야 마땅할 나약한 인간이라며 현실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액자를 내려놓고 작은 냉장고의 위에 걸린 벽 거울에 비친 창백한 스스로에게 무참함과 어리석음을 담은 조소를 띄워보냈다. 

 이제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감정은 각인자로서 아냐를 통해 들어왔다. 함께 있는 동안은 아냐의 감정이 마치 나의 것인냥 고스란히 나에게 녹아내렸고, 나의 변화를 눈치채기 전의 아냐는 여전히 나를 향해 설렘과 두근거림, 지켜주고 싶다는 든든함을 안은 채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고, 아냐는 더는 이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아냐를 통해 들어온 감정은, 쓰라렸다. 
 배신감, 이라는 것이였을까. 실망, 이라는 것이였을까.

"하아ㅡ… "

 CP사무실에 어떻게 발을 들여야 할 지 미처 고민하지 못한 내가 한심했다. 마시다 만 액체를 적당히 봉해 도로 냉장고에 넣은 채 다시 거울 속의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마신 액체와도 같은 붉은 빛이 잠시 눈에 찼다 사라지는걸 확인했고, 입가에 묻어난 혈액을 적당히 소매에 닦아냈다. 

 역시 오늘도 안 들어올 모양이네, 아냐쨩.

 잠금장치가 전부 풀린 현관을 한 번 보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으면, 다시 끝나지 않는 밤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과 마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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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는 별이 내려앉아있다.

2차/데레마스 2016. 3. 3. 22:51

방 안에는 별이 내려앉아있다.

 

 

2015-12-16

닛타냐

닛타 미나미x아나스타샤

 

 

 

 

 

나를 향해 빛나주지 않는 별을, 억지로 취했다.

"싫어요, 싫어요. 미나미."

 어느새 나를 향해서는 부정적인 말밖에 뱉지 않는 나의 별은, 나의 새카만 방 안에서 가장 밝고 하얗게 빛났다.


 까만 밤 하늘에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 그 아래 하얀 스포트라이트 속의 스테이지. 뒤에는 그 모습을 더욱 크게 비쳐주는 스크린. 무대를 향해 펼쳐져있는 푸른 사이리움들. 모든 일렁임을 눈 안에 담고도 온전히 푸른 빛을 띄며, 마이크를 다잡고 무대 그 너머를 향해 뻗어가는 아냐의 손짓에 나는 들고 있던 물병에 힘을 주어 움켜쥐고 그 순간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담았다. 

 꿈만 같던 무대가 끝난 후, 사람들도 떠나 적막하고 한산해진 스테이지. 아냐는 스테이지의 정중앙, 객석에 가장 가까운 그 끝에 앉아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살며시 웃어보이고는, 무대에서 꺼내놓던 음을 하나씩 연결해 흥얼거리고 있었다.  손 끝은 하늘을 향해 콕, 콕, 콕 별을 찍어 음과 함께 연결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냐의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미지근해져버린 물병을 건네고 손 하나를 둔 거리만큼 앉았다. 

 아냐는 눈을 살며시 떠 곧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눈에 담긴 별을 헤아릴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아냐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의 곧은 시선에 부담이라도 느낀 것인지, 아냐는 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치자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런 나를 보자 아냐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웃하며 웃었다. 그 미소에 기어이 두근, 하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계속 담아두었던, 언젠가는 하겠지만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겁쟁이같은 나의 말을. 

좋아해, 아냐쨩.





 기어이 나는 나의 방에 하얀 별을 띄우려 데려왔다. 
 
그리고 그 별은 나의 방, 가장 낮은 곳에 가라앉은채 단 한 번도 일어나 빛나주지 않았다. 내게 들려주는 별의 소리는 차갑고도 단단했으며, 아무리 따스하게 보듬어보아도 나를 향한 눈빛은 포근함이 담기지 않았다. 



 Извините.
 미안합니다.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었던 그 말에, 나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대답이 들려올거라는 사실을 수십번이고 더 마음 속에 새기고 난 뒤라 더욱 이게 옳은 반응이라는걸 인정했다. 그리고 나는 예정대로 아냐를 데리고 왔다. 손쉽게. 

「구하기 어려운거니까요. 나중에 제대로 갚아주셔야한답니다?」
「감사해요, 카에데씨.」



 Прекратите.
 그만하세요.

 손 끝도 댈 수 없게 아냐는 나를 쳐냈다. 곁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입을 열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아냐는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돌려버렸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씁쓸한 웃음만 띈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제적인건 안 좋지? 응, 알고 있어. 아냐쨩. 마음을 열 때까지 더 기다릴게. 라는 마음은, 생각보다 금방 무너졌다.


 Отпусти меня.
 놔주세요.

 스케쥴이 늦어진 밤, 돌아온 방 창가에는 나의 별님이 어떻게든 하늘에 닿고 싶은지 차가운 밤 바람을 들여가며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곧바로 달려가 그 손을 챘다. 창을 닫아버리고 까만 밤에서 잡아챈 하얀 손을 나의 두근거리는 가슴 위로 올렸다.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빼려는 아냐를 힘을 주어 당겨 안았다. 나의 두근거림이 전해지기를 바랐지만, 돌아온 대답은 뜨거운 나와는 다르게 밤 바람을 닮아 냉담했다.



 Пожалуйста откройте.
 열어주세요.

 그 날 이후로 나는 창문에 경첩을 달아 자물쇠를 걸어버렸고, 방 문고리도 역으로 돌려달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방에 별님이 없다면 더는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 방에서 별님을 보내게 된다면, 난 영영 그 별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밤마다 별님에게 나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고, 별님은 나의 애원과 갈증에 연신 얼어붙은 빛을 보이다가 기어이 아침이 되면 지쳐 잠들어버렸다. 돌아온 방의 문은 항상 긁힌 손톱자국과 핏자국이 지저분하게 붙어있어서, 그걸 닦아내고 별님이 좋아할 만한 친구들을 데려와 방 안에 즐비하게 붙여버렸다. 방 문과 방 천장, 바닥에는 온통 플라스틱 야광별과 야광별 스티커가 도배되기 시작했다.



 Дать мне.
주세요.

 어느 날은 방 안이 온통 검붉게 여기저기 눌러붙은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나의 아냐는 애꿎은 손 끝을, 손목을, 입술을, 발목을, 목덜미를 뜯고 베어내고 긁어냈다. 나에게 항의하듯이. 새카만 방 속에서도 하얀 나의 별님은 점점 붉고 지저분해져서는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머리칼을 천천히 쓸며 나는 오늘도 너를 좋아해, 라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날붙이를 전부 치워버렸다. 날카로운 손톱도 전부 깎아버렸다. 손목을 침대 다리에 묶어버렸다. 



 Спасать меня.
 살려주세요.

 주던 밥조차 거절하던 아냐는 기어이 참을 수 없었는지 내가 떠 주는 것을 한 숟갈씩 받아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먹을 줄 알았던 기세는 생각보다 약해져 있었는지 느릿하게 음식을 씹어내렸고, 주는 물도 반은 흘려버렸다. 아냐는 깊은 새벽에는 죽은 듯이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며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깼다. 그런 아냐의 곁에 다가가 땀을 닦아주었고 더는 아무 온도도 담기지 않은 탁한 푸른 눈이 내게 연신 살려주세요, 라고 말했다. 나는 별님을 풀어, 나의 잠자리에 데려가 꼬옥 안고 잤다. 별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두근거림이 닿은 것 같아 기뻤다. 



 Люби меня.
 사랑해주세요.

 라고, 별님이 드디어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나는 기쁨에 그 입에 입을 맞대었고, 아냐는 나의 행동에 어떠한 거부표현도 하지 않았다. 밀쳐지지 않는 두근거림에 드디어 허락받았다는 마음이 커져만 가서 나의 사랑을 자랑하려고 그 손을 잡아 주황빛 가로등이 줄을 선 한밤의 거리로 나왔고, 어디를 향해야할까 싶은 마음에 서둘러 아냐를 이끌고 건너편을 향했다. 



 Забудь меня.
 잊어주세요.

 인적이 드문 시간, 밤 거리를 지나는 고속버스 한 대. 
아냐는 터덜터덜 붉어진 맨 발로 나를 따랐고, 나는 기쁨에 앞만 보고 달렸다. 근처의 헤드라이트를 느끼자 아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손을 강하게 쳐냈고, 나는 그 손길에 당황하여 뒤를 돌아봤다. 

Забудь меня.

 아냐는 마지못해 웃어보였고, 빛 바랜 검은 거리에서 하얀 빛을 받던 나의 푸른 별님은 단 수 초만에 붉게 스러졌다.


"잊어.. 주세요, 려나."

 아냐쨩, 잊을리가 없잖니. 

 나는 스러진 나의 검은 붉은 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전의 밤처럼 별님을 나의 잠자리에 올리고, 꼬옥 안고 잠에 빠져들었다.
 
 나의 꿈 속에서는 여전히 그 무대가 보였고, 나는 별님이 앉아있던 그 자리 앞에 서서 푸른빛 사이리움을 흔들었다. 아냐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나를 향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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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뱀인-2

2차/데레마스 2016. 3. 3. 22:50

늑대, 뱀파이어, 인간 AU - 2

 

 

 

2015-12-12

카에닛타냐

타카가키 카에데x닛타 미나미x아나스타샤

 

 

 

 

 

 카에데씨는 그 복도를 지나자마자 급작스레 걸음을 재촉했다. 

 머리칼이 살짝 나부낄정도의 순간에 훅하고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카에데씨는 나를 안고서도 간단하게 다른 손으로 문고리를 돌려 밀었고, 우리의 등 뒤로 복도의 불 빛이 방 안을 채웠다. 그 순간에 보인 사람은 꽤나 독특한 구성이였다. 하지만 감상을 하기도 전에 카에데씨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방 문을 거세게 닫고 나를 문에서 가장 떨어진 구석 쪽 벽으로 몰아붙여세웠다. 

"카, 카에데씨?"
"기어이 뺏겨버렸군요."
"뺏기, 앗, 읏ㅡ!"

 복도에서 들어오던 빛은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지고 방 안은 저 멀리 구석에서 깜빡이는 형광등 하나의 빛을 제하고는 어색한 어둠에 파묻혀버렸다. 눈 앞의 사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조차 어렴풋이가 아닌 이상은 확신할 수 없었고, 그저 목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이물감에 얼굴을 찌푸리는게 나의 있는 힘껏인 반항이였다. 양 손목이 머리 위로 교차되게 모여 붙잡혔고 카에데씨는 나의 옆 목을 평소보다도 더 강하게 물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줬다가는 더 깊이 들어올 것 같아 아픔에도 차마 몸부림칠 수 없었다. 

"그거 아시나요, 미나미쨩?"
" 우읏, 아 무, 무엇을 "
"당신, 제가 먼저 선점한 사람이라는 것 말이에요."

 애초에 그들의 생각과 선점, 각인. 그 무엇도 내게는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았기에 뭐라고 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나는 어찌되건 이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함을 택해왔던 사람이고, 그에 따라 당연스레 카에데씨에게 지속적 공급을 하며 안전을 대가로 받은게 전부였다. 다만 어긋나기 시작한 건, 어느 날 아냐가 카에데씨와 적대시하게 되던 날부터였다. 

 카에데씨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나의 반응에 더욱 신경질적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깊이 들어오는 아픔에 입술을 깨물으며 간신히 신음을 참아냈지만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에데씨는 입을 떼고는 간신히 피가 멈춘 손목을 손톱으로 쭉 그어버렸다. 머리 위로 한 두방울씩 떨어지던 피는 기어이 그 양이 늘더니 제각기 손목을 타고 바닥으로, 머리카락을 타고 나의 이마로 흘러내렸다. 얼굴에 뜨끈한 감촉이 타고 내리자 머릿 속이 하얗게 변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할까, 오직 그 생각만이 가득 찼다. 차가운 방 안에서 오직 나만이 뜨거운 체온을 가진 것 같아 고립됨을 느꼈고, 나를 안아주던 따스한 하얀 체온이 떠올랐다.

"읏, 아 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카에데씨."
"죄송하다니, 무엇이 말인가요?"
" 제가 "
" 각인된 것, 말인가요?"
" "

 그녀는 풋, 하고 대놓고 비웃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그 눈은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보고 있을 것 같아 시선을 애써 바닥으로 내려붙였다. 

"죄송해야할 건 미나미쨩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제가 "
"그 아이가 그걸 알면서도 늑대를 선택한게 죄송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 아이. 아마도 아냐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하지만 선택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손목이 타는 고통을 느껴 미간이 점점 구겨졌고, 카에데씨는 나의 손목을 내려 자신의 손으로 상처를 꾸욱 눌러 붙잡았다. 뜨거운 상처 위로 차가운 압박감이 들자 미묘하게 아픔이 잦아듬을 느꼈다.



"으흥~! 좋은 낮! 아니아니아뉘~ 우리 방은 계속 DARK하다굿? 좋은 밤!"

 급작스레 방의 문이 벌컥 열어지더니 복도의 밝은 빛이 금빛의 동그란 단발을 비춰주었고, 이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며 머릿 속을 뒤흔드는 정신 산만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하아 "

 카에데씨는 붙잡은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깊이 한숨을 내쉬고 그쪽을 향해 돌아섰다.

"킁킁, 킁킁킁! 배웠다구~ 냄새 맡기! 킁킁킁☆ 앗앗, 이 향기로운 냄새느은~"
"여는 아니다."

 프레데리카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과장되게 허리를 숙여 킁킁대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고는 몸을 휙 돌려 깜빡이는 형광등 아래의 란코에게 다가갔고, 란코는 마시던 음료의 빨대에서 입을 떼 간결하게 대답한 뒤 다시 음료 마시기에 매진하려는 듯이 눈을 감아버렸다.

"흐흥, 사실은 알고 있었답니다! 쨔안~ 오늘의 게.스.트. 는! 여기 이 고양이인 척 하는 늑대씨!"
"내 전리품이니까 건드리지 말라구. 부러우면 잡아와."
"체에 록하지 못하네요오~ 그래도 시키쨩 빼고는 개에 관심 없지로오옹?"
"그럼 좀 가 "

 형광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 이 방에 들어서는 그 순간에 본 것을 잘 더듬어 기억하자면, 목소리에 맞는 저쪽의 인물은 리이나. 그리고 그 발치에 구겨진 듯이 눕혀져 있던 건 다 찢어져가는 옷을 겨우 걸친 미쿠였던 것 같았다. 프레데리카는 방 안의 온갖 곳에 이리저리 시비를 걸고 다니다가 카에데씨와 내 앞에 와 빙글빙글 몇 바퀴를 돌았다.

"사실사실~ 프.레.쨩. 은 이쪽이 제~일 궁금하다구!"

 프레데리카는 장난스런 목소리로 이쪽을 기웃기웃하며 떠들었고, 이내 목소리가 맹하게 코 막힌 소리로 바뀐걸로 보아 카에데씨가 그녀의 코를 붙잡은 듯 했다.

"우우우웅~ 너무해, 너무합니다. 나는 그저 궁금했을 뿐입니DA!"
"하아아 그러니까 이런 되다 만 반쪽보다는 차라리 그 아이가 우리쪽을 선택했다면 좋았을텐데 말이에요 "

 너무햇! 이라는 소리와 함께 카에데씨의 손을 쳐낸 것인지 프레데리카는 다시 멀쩡해진 목소리로 뿌뿌뿌 같은 유치한 효과음을 직접 냈다. 카에데씨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고, 그나저나 오늘은 사치코쨩이 없나보네요. 다행이에요. 정신 없음이 두 배가 될 뻔 했어요. 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는 산만함 속에서 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공기에 조금 전의 아픔이 잦아드는걸 느끼며 그 아이. 그러니까 아냐. 아냐가 선택하다, 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도움 안 되는 흥미위주의 뱀파이어가 온 것인지 "
"오우, 그렇게 말하면 프레쨩 섭섭, 습습, 삽으로 땅을 파버린다구!?"
" 하아아아 "

 드물게 카에데씨가 말장난을 치지 않는걸 보고 꽤나 지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잡은 손목을 살짝 돌려보자 순순히 놔 주었고, 프레데리카는 앗! 하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벗어난 내 손목을 다시 덥썩 붙잡았다.

"럭키, 행운! 프레쨩은 역시 행운! 마침 목 말랐는데 잘 됐다, 역시 행.운.아!"
"에 !?"
"실례하겠습니다~~"

 여기서 나는 냄새를 맡고 왔지롱, 같은 장난스런 말을 던지고는 나의 손목을 아래에서 위로 핥아올렸고, 등 줄기를 타고 찌릿함이 서더니 쓰라린 감촉이 손목을 자극했다. 프레데리카는 카에데씨가 낸 상처에서 난 굳은 피를 훑어 뱉어내고는 앙 소리를 내며 손목을 덥썩 물었다. 얕게 들어오는 이는 이내 힘을 주었는지 단숨에 힘줄에 닿았고 그녀는 그대로 입을 떼었다 다시 물었다를 두어번 반복해 세로로 길게 점선을 만드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 읏…! 대체 무슨 "
"경박하게 그러지 말고 휴대폰이나 보세요, 프레쨩."
"에에~"

 프레데리카는 족히 여덟은 난 구멍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열심히 핥으며 다른 손에 든 휴대폰을 켜 화면을 봤고, 덕분에 나는 그 빛으로 내 손목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제각기 다른 속도로 계속하여 피가 흐르고 있었고, 프레데리카는 제멋대로 그것들을 핥아대느라 입 주변부터 턱 끝까지 지저분하게 붉은 선과 얼룩이 칠해져있었다. 

"큰일, 큰일! danger 단 거! 단 거라구. 상무쨩한테 나, 혼나버려엇! 핫, 뭘 하려고 했었지!?"

 프레데리카는 휴대폰을 보더니 이윽고 입을 떼 소매로 대충 닦고는 잘 마셨어, 미나미쨩! 이라는 말과 함께 손목을 꼬옥 쥐어주었다.

"역시 달콤하다니까! 응응, 이래서 포기할 수 없다구."
"이봐요, 프레쨩. 크로네의 규율은 어디로 간 건가요?"
"에에~ 지겨운거얼 공급 없이 어떻게 살라구! 이렇게 좋은걸!"

 비밀로 하면 아무도 모를거야, 라며 쿡쿡 웃어대는 소리에 크로네의 규율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짐작하게 되었다. 크로네의 일원이 카에데씨를 꺼리는 이유, 아냐와 린에게 호의적인 이유. 아마도 회사 내의 규율과 비슷한 맥락이였을테고, 그들은 카에데씨가 이따금 말하던 되다 만 반쪽들. 즉, 공급없이 살아가는 흡혈귀들인거겠지. 하지만 그럼 프레데리카를 반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단순한 호기심이 차올랐다. 아냐와 연관이 되어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 무언가 물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에ㅡ

"궁금하지~? 나, 왜 반쪽이라고 불리는지!"
" 에?"

 프레데리카는 나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이 태연히 말해왔다. 그런 능력은 없을텐데도 들켰다, 라는 생각에 강자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한 채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렸고 되도록이면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만 고민하기로 마음먹었다.

"프레쨩, 하프니까요. 알지요, 미나미쨩?"
" 하프 ?"
"그래요. 하프들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답니다. 무엇이 될 지."

"입 다물고 있으면 미인, 프레쨩. 입을 열면 초 미인! 게다가 섹시한 뱀파이어라니, 완전 흥.행.요.소!"

 꺄핫! 하며 웃는 목소리에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입을 꾹 닫았다. 카에데씨는 재차 나의 손목을 꼭 붙잡아주었고, 그 차가움에 상처는 또 다시 천천히 마비되어갔다. 카에데씨가 한 말과 프레데리카의 말을 합쳐 정리해 생각하는 와중에, 프레데리카는 휴대폰에 상무쨩☆이라는 발신인의 착신화면이 뜨자 황급히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저래보여도 대치일에는 꽤나 큰 일을 해준답니다."

 하프라는건 불공평하지요. 시작부터 남들과 다르니까요. 라는 카에데씨의 말에 아냐에 대한 걸 물어보고자 했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요, 그 아이가 진작에 이쪽이 되었다면 당신을 빼앗길 일도 없었고, 이렇게 전세가 밀릴 일도 없었을거랍니다."

 카에데씨는 갑작스레 젖어드는 목소리를 하고는 붙잡은 나의 손목을 살짝 놔주고 상흔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의외의 행동에 나는 손목을 붙잡아 쓸었고, 까끌하게 쓸리는 느낌에 인상을 구겼다. 

"전부 다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미나미쨩도, 저도. 그쪽의 이야기만 듣고 우리가 나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된답니다."

 확실히 주변에는 카에데씨와의 적대 관계 사람이 더 많았고,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꽤 많았다.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론 이쪽도, 그쪽도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기에 그 어디도 신뢰할 수 없었다. 어딜 가나 와닿지 않는 붕 뜬 이야기였으며, 그나마 체감되는건 카에데씨가 나에게 주는 날카로운 감촉 뿐이였다. 나는 카에데씨의 말에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해 그저 묵묵히 목덜미와 손목을 번갈아 눌러잡았다.

"우리는 그저 각자 개별적일 뿐이에요. 보시다시피 개체 수도 적지요. 하지만 저쪽은 그룹이랍니다. 여럿이서 우리 하나를 노리지요. 그런 건 비겁하지 않나요?"
" "
대신 적은 개체로 월등히 강하지만요. 저들이 지금보다 더 많아져야 저울이 맞을 만큼

 카에데씨는 이어 무언가 웅얼거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타당성 있는 말이였다. 이쪽은 항상 한 사람씩 움직였으며, 그쪽은 다수가 움직였다. 하나를 노리는 여럿, 이라는 상황만 두면 꽤나 비겁한 일로 보였다.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으로. 멀리 있는 어느 나라의 일처럼 다가오는건 마찬가지였지만.



"ㅡ미나미쨩이 우리의 전력이 되어준다면 기쁠 것 같네요."
"네?"

 돌아가고 싶다, 라는 말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았으며 지친 기색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근한 잠자리에서 눈을 떠, 역시 다 꿈이였어. 라고 말하는 스스로를 상상하는데, 카에데씨는 나의 손을 꼭 붙잡고는 예상 외의 말을 꺼냈다. 

"어머, 제가 설마 공급만 받는 흡혈귀로 보이는 건 아니겠지요?"

 가벼운 웃음소리에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라는 주제가 머릿 속을 채워갔다. 카에데씨는 곧 깜빡이는 형광등을 향해 걸어갔고, 앉아있던 란코에게 손짓을 했다. 

우린 이만 가지요, 실패작 란코쨩

 무언가 말을 하는 듯 하더니 카에데씨는 란코보다 먼저 문을 향해 갔고, 근처의 스위치를 눌러 방 안의 조명을 전부 켰다. 그리고 곧게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엄지와 검지로 번갈아 입가를 만졌다.

"잘 생각해보세요, 미나미쨩. 남에게 지켜지기만 할 것인지, 스스로를 지킬 것인지. 기회를 주지요."

 당신과 같이 목숨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쪽을 선택했을 때 좋은 전력이 되지요. 나쁜 제안은 아니니 잘 생각해봐요. 라는 말과 함께 카에데씨는 특유의 도드라진 송곳니가 보이게 웃으며 먼저 방을 나갔고 나는 기회를 준다, 의 의미에 대해 얼핏 떠오른 명제가 과연 옳은 것인지 재차 되짚어 생각하게 됐다. 

 멍하니 자리에 서 이리저리 지저분하게 물린 손목을 내려다보며 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내가 끼어들게 되는 것에 대해 열심히 생각해봐도 이렇다 할 좋은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카에데씨의 제안에 응하게 된다면 나는 그야말로 아냐의 마음을 배신하는 꼴이 되는 것이였으며, 또한 제안을 섣부르게 거절하기에는 내가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강한 유혹이 되어 박혀버렸다. 

"ㅡ"
" 아, 란코 쨩?"

 당장 답안을 내놓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 굳어 서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저 너머에 앉아있던 란코는 어느새 인기척도 없이 내 바로 앞에 서서 나를 빤히 봤고, 그런 란코를 향해 시선을 올리다가 란코가 마시던 음료에 눈이 갔다. 무난한 투명 병에 담긴 그것은 새빨갛고도 검은 빛을 띄며 점도있게 울렁였고, 꽂힌 빨대 위로 서서히 올라가 란코의 빨간 입술을 지나 들어갔다. 란코는 나의 시선의 이동에도 아랑곳 않았고, 이어 내가 란코의 붉은 눈과 눈을 마주하자 나의 한 쪽 눈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살며시 가리키며 빨대를 입술에서 떼어 천천히 입을 달싹였다. 

잊지 마세요

 란코는 꾸밈없는 한 마디의 말을 하고는 다시 입에 빨대를 가져다 댔다. 이어 얻어입은 듯한 트레이닝 져지의 늘어난 주머니 사이에서 하얀 붕대 하나를 꺼내더니 나의 다른 손에 쥐어주고는 유유히 카에데씨가 나간 뒤를 따라 나갔다.

 잊지 말라, 는 그 말이 란코의 붉은 눈과 겹쳐 머릿 속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익숙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 미나미가 다치는 것. 싫습니다. 그런 선택, 하지 않습니다. 절대.

 띄엄띄엄 떠오르던 목소리가 곧 온전한 문장이 되었고, 그걸 기억해내자 나는 아냐가 포기한 것과 내가 어떻게든 지키려던 그것이 같은 것이라는걸 깨닫고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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