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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
2차/데레마스
2016. 5. 3. 00:16
페트
2016-05-02
미나(미오)아이
닛타 미나미x타카모리 아이코(x혼다 미오)
아주 평범한 오후다.
함께 하게 된 유닛의 멤버들은 연습이 끝나자 제각기 갈 길을 찾아 연습실을 떠났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장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이후 스케줄은 딱히 없다는 것이 떠올랐기에 귀가할까, 싶었지만 느지막이 공기를 데우며 서서히 떨어져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어딘가 비어버린 느낌이 들어 프로덕션 건물 근처의 벤치에 등을 기대고 살며시 고개를 젖혔다.
"…해."
"ㅡ에요. 괜찮답니다."
띄엄띄엄 들려오는 대화. 귀갓길이기에 여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유달리 한 사람의 나긋한 목소리만큼은 곧바로 구분이 되었다. 요 며칠 내내 연습실에서 함께 한 그 아이의 목소리. 트레이닝을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길게 대화한 적이 몇 없었지만, 한 번 대화한 내용만큼은 어째서인지 바쁜 머릿 속에서 여유로이 자리를 잡고, 저녁 노을을 등지고 가는 귀갓길마다 한두 번씩 의식 위로 떠오르곤 했다. 가만히 떠오른 그것에 집중하면 나는 어느새 귀갓길의 끝자락에 닿아있게 되는, 그런 느긋함이 밴 목소리.
"돌아가는 모양이네."
바람을 쐬며 살며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연습의 열기는 이미 식어버리고, 지쳐버린 무게감이 나를 꾹 하니 누르고 있었다. 저 너머 건물을 나서는 두 사람은 오늘도 여전히 밝게 웃으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늘상 보는 그런 장면. 아이코가 신 유닛에 참가하게 된 후로는 미오가 아이코를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헐레벌떡 달려온 듯한 오늘의 모습은, 분홍 져지 상의가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였고, 그 한 손은 아이코의 하얀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휙 하니 고개를 돌려버리고 얼굴을 붉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맞잡고 수줍게 하루를 정리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열심히 그 둘을 응원해주던 사람들, 몰래 도와주려고 이리저리 뛰던 사람들, 그리고 우물쭈물대며 린에게 도움을 구하던 미오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코를 마주한 나. 문득 여러 사람들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가다가, 아이코라는 아이를 상상하던 내가 떠올라 가벼운 웃음이 새어나왔다.
"분명 굉장히 상냥하고, 나긋한 아이였지. 미오쨩의 이야기에서는."
그리고 직접 함께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시간을 신경쓰지 않게끔 나를 감싸주는 듯한 따스한 목소리. 혹여라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 갖은 고민을 하는 듯이 천천히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서두르지 않고 나긋하게 떼는 발 걸음.
"오, 오늘도 신경 써줘서 고마워… 아쨩."
"으응, 이 정도는 별 거 아닌걸요. 미오쨩이 찾아와주는데 이 정도는… 얼마든지."
익숙하게 물병을 건네는 하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 미오를 찾아오던 아이는, 미오의 연습이 끝날 때까지 쭉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온기를 품은 주홍의 햇빛이 그 등을 너머 미오에게 닿았고, 나는 그 햇빛을 등지고 앉아 그보다 따스하게, 하지만 데이지 않을 온화한 온도로 미오를 바라보던 아이코를 기억한다. 미오가 연습이 끝난 후 바로 찾아올 수 있게 아이코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도 어느 한 순간은 잠시 자리를 떴나, 했는데 이어 다시 같은 자리를 찾아 앉고, 미오의 연습이 길어질 수록 아이코가 자리를 잠시 비우는 경우도 잦아졌다.
"신기하다니까… 아쨩이 챙겨주는 이 물, 항상 시원해!"
"후후… 그런가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눈치채게 되었다. 아이코가 익히 건네는 그 물은, 혹여나 미오가 갈증이 날까봐 챙기던 물이였다는 것을. 갈증을 달래줄 시원함이 가실 때마다 매번 매점으로 돌아가 시원한 새 물로 바꿔온다는 것을. 오늘의 물도 역시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 그녀에게 건넬 물도 그 배려를 닮아 천천히 상대의 갈증을 흘려보내줄 것이다.
"… 후우.."
어째서인지 둘을 보니 더욱 몸이 무거워졌다. 아니, 이유를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는 체 하고 싶었다. 깊이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벤치에 몸을 널다시피 기댔다. 손 끝, 발 끝이 하나같이 콘크리트 바닥을 향해 끌려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열기는 식었지만, 그 자리를 바짝 쫓아 갈증이 가득 채웠다. 그래도 손가락 하나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이어 들리던 그 목소리마저 저 멀리로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주 조금만 더 이대로 눈을 감고 있으면 늦장 부리는 햇빛도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까만 밤이 찾아오면, 나는 그제서야 자리를 뜰 수 있을것만 같았다.
"… 나… "
텁텁하게 두어 번 간신히 침을 삼켜보았다. 요즘들어 바쁜지 함께 식사조차 하지 못하는 아냐가 떠올랐다.
"미나… "
그러다가도 금방 머릿속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지친다는 것은 이렇게도 사람의 머릿속마저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라는걸 실감했다. 그저 평소와 같은 오후일 뿐인데도, 어째선지 오늘은 더욱 지쳤다. 그것은 분명ㅡ
"미나미씨… ?"
"……아이코쨩?"
살짝 상체를 숙인 채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나의 안색을 살펴보던 중이였는지, 내가 눈을 뜨자 시야에 금방 그 두 눈이 들어왔다.
"물, 마시겠어요? 너무 차진 않을거예요."
"… 물? 아, 응. ……고마워."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춰있었던 것 같다.
다시 사고가 정리되어갈 쯤에는 아이코는 자리에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아까보다도 더 햇빛은 가라앉아 있었고, 나의 손에는 물병이 들려있었다. 연분홍 체크무늬가 그려진 하얀 손수건으로 싸인 페트병은, 냉장고에서 막 꺼내진 억지스레 시려 손을 차게 하는 온도가 아닌, 갈증을 날리는데 필요할 만큼의 딱 적당히 시원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손수건 덕에 손도 젖지 않았지만, 한 순간 시원한 물병보다도 어째서 이것이 손수건에 싸여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도 따스한 배려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한 손에 들린 물병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뚜껑을 열어 두어 모금 마셔 넘겼다. 입 안을 적시며 흘러들어가는 물은, 평소보다도 더욱 시원하게 갈증을 녹여주었다. 그렇게 천천히 녹아버린 갈증은, 저 너머에 스며 아마 당분간은 고개를 내밀 것 같지 않았다.
"…손수건, 세탁해서 줘야겠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를 언제까지고 끌어당길 것만 같던 콘크리트가 드디어 놔준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은 채 가벼워진 무게감을 느끼며 물병을 싸고있던 손수건을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네."
생각보다 이르게 자리를 뜨게 된 것에 왜인지를 곱씹지는 않기로 했다. 그저, 내일은 유닛에 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주제로 말을 건넬 구실이 생겼다는 것에 대해 한 켠으로 웃음이 지어졌을 뿐이다.
걸음을 옮겨 프로덕션을 나왔다.
손에 들린 페트 속 물이 나의 걸음에 맞춰 찰랑이며 다시 따스해진 손을 간질였다. 어딘가 상냥한 그 시원함은, 결코 내 온기를 빼앗아가지 않았다. 이 정도는 나도 받아도 괜찮은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